7월 17일은 역사가 단정하게 앨범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지와 공포, 화약 냄새를 풍기는 날들 가운데 하나다. 1791년 파리에서는 시민들이 샹드마르스에 모여 루이 16세의 퇴위를 요구했다. 1918년 러시아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는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 그리고 네 명의 동행인이 감시자들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두 장면 사이에는 127년이 놓여 있지만, 불편한 질문 하나가 이들을 잇는다. 혁명이 반대자를 더 이상 정치적 반대자가 아니라 자신의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1791년 7월 17일의 파리는 긴장된 기대에 휩싸인 수도였다. 한 달 전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탈출을 시도했다. 이 도주는 6월 21일 바렌에서 끝났다. 국왕은 감시 아래 파리로 돌아왔고, 그의 명성은 산산조각 났다. 많은 프랑스인은 이제 그를 입헌군주가 아니라, 조국이 가장 절실히 그를 필요로 했을 때 나라를 떠나려 했던 사람으로 보았다.
당시 에콜 밀리테르와 센강 사이에 있던 넓은 공터인 샹드마르스에는 청원서가 놓여 있었다. 국왕의 퇴위와 공화정 질서를 요구하는 서명이 목적이었다. 이 장소에는 쓰라린 상징성이 있었다. 불과 1년 전 그곳에서는 연맹 축제가 국가적 단합을 기념했다. 당시 국왕, 국민의회, 국민방위대와 수십만 명의 관중은 국가와 법, 새 헌법에 대한 공동의 충성을 맹세했다. 화해의 축제장은 1년 만에 분열의 현장이 되었다.
상황은 오전부터 격화됐다. 조국의 제단 아래에 숨어 있던 두 남성이 소요를 일으키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군중은 그들을 린치했다. 시 당국은 계엄령으로 대응했다. 파리 시장 장실뱅 바이이와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은 샹드마르스로 진군했다. 계엄령을 알리는 붉은 깃발이 펄럭였지만, 시위대는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총성이 울렸다.
국민방위대는 처음에는 공중에, 이어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수십 명이 사망했다. 동시대 기록과 정치 진영, 후대 역사가들의 집계가 서로 달랐기에 정확한 사망자 수는 논쟁거리로 남았다. 분명한 것은 샹드마르스 총격 사건이 혁명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점이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온건파는 공화정을 요구하는 급진적 목소리보다 질서를 우선시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새 권력이 민중을 폭력으로 침묵시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머리에 가루를 지나치게 뿌린 정치인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아니었다. 7월 17일 이후 정치 지형은 바뀌었다. 공화주의 신문과 클럽은 압박을 받았고, 활동가들은 도피하거나 잠적했다. 동시에 한때 미국과 프랑스의 자유 투쟁 영웅이었던 라파예트는 많은 파리 애국자들의 눈에 빛을 잃었다. 자유와 질서를 결합하려 했던 그는 이제 동포에게 총을 쏜 질서를 상징하게 되었다.
1918년 7월 17일은 같은 논리가 훨씬 더 음울한 단계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내전에 빠져들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1917년 1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들의 지배는 여전히 도전을 받고 있었다. 백군, 지역의 적대 세력, 외국 개입군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새 정권을 위협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는 적대 세력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랄 소비에트는 전 황실 가족을 억류하고 있었다.
7월 17일 밤, 감시자들은 니콜라이 2세, 황후 알렉산드라, 그들의 다섯 자녀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아, 알렉세이와 주치의, 그리고 세 명의 하인을 이파티예프 저택 지하실로 데려갔다. 얼마 뒤 처형대는 죄수들에게 총을 쐈다. 니콜라이와 함께 죽은 것은 실패한 전제군주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죄가 전혀 없던 아이들 역시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결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로마노프 가문은 300년이 넘는 러시아 차르 통치를 상징했다. 니콜라이 2세는 권위주의적 완고함, 사회적 긴장, 제1차 세계대전의 참사 속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이끌어내지 못했다. 1917년 3월 그의 퇴위는 왕조의 종말을 확정했다. 그러나 가족의 살해가 이 붕괴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었다. 그것은 신호였다. 옛 질서로의 귀환은 상징으로서조차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호였다.
바로 여기에 1791년 파리와의 연결점이 있다. 샹드마르스의 국민방위대도 예카테린부르크의 볼셰비키도 진공 속에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은 안전, 위협받는 혁명의 보호, 반혁명과 혼돈에 대한 공포를 내세웠다. 그 공포는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책임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정치적 반대자가 오직 적으로만 여겨지는 곳에서는 보호와 억압의 경계가 빗속의 종이처럼 빠르게 얇아진다.
프랑스는 이 교훈을 특히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배웠다. 샹드마르스의 총성은 혁명을 끝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 대립을 심화시켰다. 1792년 8월 왕정은 무너졌다.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올랐다. 이어 과거의 혁명가들까지 서로를 박해한 공포정치가 뒤따랐다. 혁명이 단순히 자기 자식을 잡아먹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흔히 논쟁을 더 이상 논쟁으로 견디지 못한 이들을 먼저 삼켰다. 꽤 암울하지만, 안타깝게도 세계사에서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러시아 역시 그 여파를 오랫동안 안고 갔다. 로마노프가의 죽음은 군주제의 과거를 평화롭게 끝내지 못했다. 대신 그것을 신화, 상처, 정치적 상징으로 만들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그 대가는 폭력의 문화였다. 그 문화 속에서 이른바 정당방위는 빠르게 영속적 지배의 도구가 되었다. 이 가족에 대한 기억은 오늘날까지도 차르 제국의 역사, 종교적 순교 서사, 정치적 해석의 소재로서 논쟁의 대상이다.
7월 17일은 프랑스에 국가적 통합의 광장이 국가 폭력의 장소가 된 순간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세계는 혁명적 공포가 모든 인간적 경계를 넘어선 러시아의 한 지하실을 기억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이 사라지는 데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갈등이 규칙과 권리, 이견을 견뎌내는 데서 살아간다. 바로 여기에 이 날이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자유를 지키려는 사람은 첫 번째 위기 앞에서 그것을 창밖으로 내던져서는 안 된다.
출처
- Paris Musees: 1791년 7월 17일 샹드마르스 계엄령 선포
- Assemblee nationale: 샹드마르스 사건 이후 입헌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사이의 분열
- 1914-1918-online: 니콜라이 2세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맞은 그의 최후
- Library of Congress: 로마노프 가족 살해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