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은 말이 얼마나 빠르게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일깨운다. 1870년 이날,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그전까지 외교관들 사이의 분쟁처럼 보였던 일은 며칠 만에 수십만 명의 병사를 움직이게 했고, 유럽을 새로운 시대 속으로 끌어들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스페인에 있었다. 1868년 혁명 이후 스페인 왕위는 공석이었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레오폴트 공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파리에서는 이 전망이 경보를 울렸다. 동쪽의 프로이센, 남쪽의 프로이센과 연계된 군주, 프랑스의 시각에서 이는 전략적 포위망의 냄새를 풍겼다. 실제로 레오폴트는 곧 후보 지명을 포기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 국왕이 앞으로 다시는 마드리드를 위해 호엔촐레른 가문 인물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영구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무대에 등장했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었으며, 거의 영화적이라고 할 만한 정치적 연출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프로이센 국왕은 바트 엠스에서 프랑스 대사를 정중하게 접견했지만, 추가 보장은 거절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만남에 관한 보고를 줄이고 공개해, 파리에서는 모욕처럼,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오만함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이른바 엠스 전보는 마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어로 된 도화선이었다.
7월 19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전달했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장관들은 국가적 위신, 과거 프랑스의 영광에 대한 기억, 그리고 프로이센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가정에 기대를 걸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 등 남독일 국가들은 동맹에 따라 프로이센에 합류했다. 프랑스는 갑자기 군사 계획, 동원, 철도 물류가 훨씬 더 잘 준비된 독일 연합군과 맞서게 되었다.
이것은 단 하나의 전보가 필연적으로 일으켜야 했던 분쟁은 아니었다. 제2제정과 부상하는 프로이센 사이의 긴장은 수년에 걸쳐 누적되어 왔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완성하고자 했고, 프랑스는 바로 그 유럽 세력 균형의 변화를 두려워했다. 전보는 어느 쪽도 붙잡을 필요가 없었던 기회를 양측에 제공했다. 하지만 국가적 자존심에는 나쁜 습관이 있다. 목소리의 크기를 힘과 혼동하는 것이다.
프랑스에는 재앙이 뒤따랐다. 이미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 후 포로가 되었다. 제2제정은 붕괴했고, 9월 4일 파리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파리는 혹독한 포위와 기아, 정치적 급진화를 겪었다. 패배와 사회적 긴장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이 태어났고, 그 유혈 진압은 오늘날까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의 장소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라인강 너머에서도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1871년 1월 18일, 독일의 제후들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이 장소는 의도적으로 선택되었다.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권력을 상징했고, 이제 독일의 승리를 위한 배경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새 제국은 알자스와 로렌의 일부, 그리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었다. 이 국경 변경은 수십 년 동안 프랑스에서 복수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따라서 1870년 전쟁은 단순히 제1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 아니었지만, 그 정신적 지형을 깊이 형성했다.
때로 세계사는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축약된 문서와 모욕감을 느낀 정부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외교 공보문, 오해를 부르는 게시물, 혹은 계산된 도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 패턴을 즉시 알아볼 수 있다. 언어가 자동으로 전쟁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신뢰를 태워버릴 수는 있다. 그러므로 1870년 7월 19일은 국가적 흥분의 열병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한 경고로 남는다.
거의 정확히 99년 뒤, 같은 날짜는 전혀 다른 울림을 얻었다. 1969년 7월 19일, 아폴로 11호는 달 뒤편으로 사라져 잠시 지구와의 무선 연락을 잃었다가, 달 궤도 진입을 위해 엔진을 점화했다.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하루 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착륙선 이글을 타고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다.
처음에는 이 비교가 과감해 보인다. 한쪽에는 유럽의 전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국의 우주 비행 임무가 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권력, 기술, 그리고 국가가 자신의 위대함을 눈에 보이게 하려는 충동을 말해 준다. 1870년에는 동원 계획, 전신, 철도가 승패를 갈랐다. 1969년에는 컴퓨팅 능력, 로켓 제작, 전 세계 무선망이 인간을 달로 실어 날랐다. 기술은 결코 단순한 도구에 머물지 않았으며, 언제나 사회의 정치적 자기 인식까지 형성했다.
차이는 시선의 방향에 있다. 1870년에는 분쟁 중인 대륙에서 국경, 위신, 지배권이 문제였다. 아폴로 11호는 인류에게 아주 먼 거리에서 바라본 지구, 작고 푸르며 눈에 보이는 국경선이 없는 지구를 보여주었다. 바로 여기에 이 7월 19일의 조용한 핵심이 있다. 국가들은 종종 다른 나라를 능가하는 데서 위대함을 찾지만, 우주에서 바라보면 그러한 경쟁은 놀랄 만큼 작아 보인다. 정치 지도자들이 긴장 고조를 앞두고 생각 속에서 한 걸음 더 자주 물러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프랑스에게 이 날은 두 기억을 모두 품고 있다. 1870년의 패배는 제3공화국의 탄생을 앞당겼고, 프랑스-독일 관계를 오랫동안 오염시킨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이 부담스러운 역사에서 유럽 통합의 핵심으로 꼽히는 협력이 탄생했다. 오늘날 프랑스는 우주센터 CNES와 유럽의 우주 협력을 통해 과학적 야망을 다른 나라에 맞서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 함께 조직하는 국가들 가운데 하나다.
7월 19일은 편안한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두 길을 보여준다. 하나는 소통이 전쟁의 횃불로 변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이 인간을 지구 너머로 이끄는 길이다. 바트 엠스와 달 궤도 사이에는 겨우 99년이 놓여 있다. 역사적으로는 눈 깜짝할 순간이지만, 인간적으로는 하나의 온 세상이다.
출처
- 국민의회: 공화국 선포와 1870년 전쟁 참전
- 파리 기록보관소: 1870년 프랑스의 전쟁 참전
- 국방부: 1870년 전쟁의 결과
- NASA: 아폴로 11호 임무 개요
- CNES: 유인 우주 비행의 역사